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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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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내린 날 "우주가 내릴 때는 꼭 우산을 써야 해." 소녀가 말했다. "우산." "그래, 우산." 노란 우비를 쓴 소녀는 자신의 체구에 맞는 아담하고 귀여운 노란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걸. 여긴 실내니까. 비가 내려도 맞을 일 없어." "비가 아니야. 우주가 내리는 거야."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무심코 소녀의 시선 끝을 올려봤다. 막혀 있는 천장과, 걸려 있는 샹들리에의 불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샹들리에 위에는 조금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나는 그것부터 이해가 안 되는데." "곧 우주가 내릴 거야. 별과 어둠, 자외선이 흘러 내릴 거야. 장화를 신으면 좋겠지만, 없다면 뚫리지 않은 가죽 구두로 충분해." "우주." "그래, 우주." 나는 바닥을 내려 봤다. 소녀가 나를 따라 고개를 ..
나무에서 머리가 자란 날 外 나무에서 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떡잎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영락없이 머리다. 태아처럼 투명하고 만지면 푸욱 꺼지는 부드러운 머리였는데, 점점 커지더니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는데, 머리카락이 까슬 거리는 직모라 쓰다듬으면 찔리고 말았다. 찔린 자리에서 피가 나길래 만지는 것은 그만뒀다. 눈꺼풀은 있었는데 언제나 감고 있어서 눈알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열어젖힌다면 확인은 할 수 있겠지만, 내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든 나무가 나를 엿볼 수 있겠다 싶어서 불을 끄고 커튼을 쳤다. 귀도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도 노래를 들으면 잘 자란다는데, 그렇다면 귀를 달 것도 없이 소리를 들을 ..
고아 外 고아는 어미를 찾고 있다. 슬픈 눈을 한 고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제 어미를 찾고 있다. 간신히 기억하고 있는 어미의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도 어미를 닮지 않은 낯선 어른이 다가온다. 고아는 겁먹은 표정으로 어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고아는 슬픈 눈으로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ㅡ 손톱이 좀처럼 자라지 않아 엄지손가락 살을 벗겨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옆으로 길게 자라 있었다. 잘 보니 반달 모양이라 맞은 편도 벗겨보니 둥근 원 모양이 되었다.
이번 생은 안될지도 몰라 어릴 적의 이야기다. 초등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다른 지역의 중학교로 진학한 나는 별로 친구가 많지 않았다. 이미 완성된 그룹에는 끼어들 틈이 별로 없었고, 괴롭힘당하는 기간이 길어 음울한 쪽으로 변질된 성격을 받아줄 만한 아이도 없었다. 특별한 괴롭힘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일도 없었다. 나 홀로 반에서 떨어져 있는 존재인 것처럼 시간만이 흘렀고, 1학년을 마치며 반에서 진행한 롤링 페이퍼에는 두서없는 웅얼거리면 밖에 없었다. 수준이 떨어져서 도저히 못 어울리겠네,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만큼 착한 아이들도 없었지만, 당시의 나만이 그것을 몰랐다. 2학년에 올라가도 딱히 바뀌는 것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반이 바뀌고 한 달이 지날 무렵 특별한 변화가 생겼다. 누가 시킨 것..
저승의 모습 外 어느 날, 선생님이 내게 재밌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콘솔 창을 켜더니 이런 것을 입력했다. Weight : 36.4kg 그러자 목각인형이 마치 춤추듯이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선생님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잘 봐라, 이게 저승의 모습이란다. 그 모습을 나는 언제까지고 가만히 응시했다. ㅡ 나는 어릴 적 할아버지 집에 방문하는 것이 싫었다. 그 집 현관에 있는 전시장 안에는 박제된 라쿤의 박제가 있었고, 나는 박제에 인사하게 하는 할아버지가 무서웠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현관 쪽에서 동물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 밝을 때까지 벌벌 떨며 밤을 지새웠다. 그 얘기를 할아버지에게 하자 할아버지는 반색하며 말했다. "수호신이 나쁜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너를 지켜준 거란다." 그 뒤로 나는 할아버지의 집에 방문할 ..
혹시 스팸문자발송기를 만날 수 있을까요? 안경점에서 문자가 왔다. '(광고) OOO 고객님, 생일 축하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그제서야 나는 내 생일을 알게 되었다.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내 생일을 십 년도 전에 방문한 안경점의 문자 발송기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자 목록을 위로 올리면 매년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내용은 문자가 날아오고 있었다. 나와 문자 발송기의 기묘한 우정은 그렇게 십년 가까이 이어진 것이다. 전화번호로 가득한 내 핸드폰에서 이상하게도 스팸만이 가장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 온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십년 전과는 달리 어디든 갈 수 있는 나는,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도 쉽게 방문할 수 있었다. 혹시 헛걸음할까 싶어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보니 주말에도 ..
미완성 단편 (민) 민, 처음 너와 만난 순간을 기억해. 그것은 내 머릿 속에서 몇 번이나 회오리 치며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기억이기에, 민, 나는 너를 보다 특별히 여겼단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양복을 차려입고 빵모자를 푸욱 눌러 쓴 단정함일까, 아니면 네가 들어오는 순간 화악 하고 퍼져나간 소독약 냄새일까. 그것이 무엇이건 나는 너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의 살짝 내려간 한 쪽 입꼬리와 반쯤 닫힌 음울한 얼굴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단다. 너의 불행의 주박은 다른 사람마저 끌어들이는 것이란다, 민. 그렇다고 내가 너를 탓할 생각은 없단다. 민, 너는 네가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하고 더 많은 짐을 지려는 그런 아이였단다. "부모님이 죽었어요." 당돌하게 너는 그런 얘기를 했단다, ..
덩어리 어릴 적부터, 나는 멈춰 있는 세상을 본 적이 없었다. 벽은 쉼 없이 꿈틀거렸고, 천장에는 길게 이어진 검은 덩어리가 내려왔다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온 세상은 검은 것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운이 좋아야만 간신히 그 사이로 사물의 원형을 볼 수 있었다. "색맹인 것 같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색깔을 볼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저 세상이 검은색으로 뒤덮여 있을 뿐이었다. 아이에 불과했던 내 빈약한 표현력으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고, 나는 전색맹 판정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부모님은 의사의 말을 믿었다. 색맹을 위한 그림책을 사주거나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하자,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이 색맹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