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

(31)
누나 外 누나가 거북을 데려왔다. 죽지 않으니 내게 알맞다고 한다. 누나는 거북보다 일찍 죽었다. ㅡ 진동하는 별의 소리에 놀라 깨었다. 울음, 웃는 건 확실히 아니고. 다시 들으니 역시 우는 게 맞았다. ㅡ 어깨가 들썩거린다. 심장이 뛸 때마다 그랬다. 고동과 고통은 닮았다. ㅡ 개미는 시체를 먹고 산다. 누가 죽어야 개미가 사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도 반쯤은 개미다.
재작년쯤 썼던 추리소설 도입부 이사악 이고레비치 티냐노프(Исаак Игоревич Тынянов), 아니, 이제는 그저 이사악 티냐노프는 오랫동안 아리아인들과 피를 섞어온 조상들의 노력이 색바랠 정도로 유대인의 전형이였다. 검은 곱슬머리와 어쩐 일인지 5도 정도 기울어져 있지만 여전히 인상적인 크고 긴 코, 주근깨 박힌 얼굴과 말 끝마다 "하지만."을 붙일 것같은 불만스러운 표정 등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러한 인상이 어찌되었건 그와 조금만이라도 함께 한 사람들은 모두 그가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일반적인 유대인'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괴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티냐노프 가(Тынянов 家)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사악은 어릴 적부터 랍비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심지어 명절에만 간신히 만날 수 있는 몇몇 친척들은 이미..
열병 外 열병 지독한 열병이었다. 온몸을 관통하는 영감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고, 끓어오른 피가 춤추며 떠올라 붉은 안개구름이 되어, 이윽고 아스팔트 위에 말라붙은 개구리처럼 수분기 하나 없는 시체가 되는 그런 열병이었다. 달빛은 태양만큼 밝았고, 어느 때는 낮인 것 같았고 어느 때는 밤인 것 같았다. 두 눈은 진작에 멀었거늘 파리의 겹눈처럼 열기만을 보고 이해했다. 그것은 영감이었다. 또한 끊임없는 마찰이었다. 파에톤의 태양 마차가 나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비참한 한 마리의 개구리였다. 여름날 아스팔트 위에 얹어진 비극적인 흉물이었다. 그 날도 여름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아 온 세상의 수분이 말라붙은 그런 여름날이었다. 눈물샘이 말라붙어 누구 하나 울 수도 없는 그런 뜨거운 날, 차..
연재 중단 후기 는 2019년 브릿G 좀비 문학 장편 소설 부문에 제출하기 위해서, 대략 2주 정도 동안 준비했던 장편 소설이다. 당시에는 거의 일일연재의 추세로 연재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중학교 이후로 처음 써본 장편 소설이라서 그럴까, 아무래도 사이트 내에서 반응이 좋지 않아서 수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연재를 멈췄었다. (최신화는커녕 몇 편간 조회수 0회!) 나 개인의 평가는 어떤가 하면은, 사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정말 재밌는 글이다. 이어질 내용은 더욱 흥미진진하겠지. 하지만 내가 대중적인 취향에서 괴리되었다는 것만 통감할 뿐이었다.... 언젠가 마저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솔직히 이만큼 재밌는 글이었으니까, 성실하게 완결을 냈다면 동상이나 은상 하나쯤은 손에 쥐어 볼 수 있지 않..
김하나 - 외래종(1)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소원이 이뤄지면, 의외로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제 경우엔 유진이가 죽었을 때 그랬어요. 틀림없이 기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내가 죽였나?' 같은 이상한 망상까지 떠올랐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마 평범하게 납득하실 거예요. 제가 그 아이가 죽길 바란 게 그리 이상한 게 아니란 걸요. 우선 그날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유진이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사건 다음 날이었습니다. 새벽 내내 사건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고 하는데, 부모님은 저녁 뉴스를 보지 않으시고, 저도 뉴스라고는 포털 사이트 메인을 훑는 정도가 다였기 때문에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사건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그만큼 사..
박서한 - 은인 그때가 아마 밤 11시, 12시쯤이었을 거예요. 저는 런닝을 하고 있었어요. 형에게 수험은 체력 싸움이라는 얘기를 계속 들어와서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야자가 끝나면 언제나 런닝을 했거든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집 근처 산책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형한테 전화가 오더라고요.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난리가 났다고요. 그러면서 뉴스를 확인하라길래, 저는 핸드폰으로 뉴스를 봤어요. 정말로 난리가 났더라고요. 한국 최초의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 발생이라고, 그때는 우리 시 이름만 나와 있어서 저는 진짜 큰일 났다 싶어서 바로 집으로 돌아갔죠. 집에 돌아갔더니, 의외로 부모님은 담담하더라고요. 저는 당장 피난 준비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저하고 형이 불안해하는 와중에, 상황은 척척 정리되더라고요. 1시간 뒤에 ..
신예리 - 동물 시체에서 사는 아이(3) 정유진에게 불쾌한 편지를 몇 통 받은 것만 뺀다면 중학교 시절 3년을 나는 즐겁게 보냈다. 그 때문에, 나는 유진이를 거의 잊고 지냈고 무심코 K 고등학교를 1지망으로 제출하고 말았다. 집이 가까운 만큼 나는 높은 우선순위를 받아 간단히 입학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실수였던 것이다. 당연히 옆집에 사는 유진이도 K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나는 다시 3년간 정유진의 죄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걱정과 별개로, 나는 새로운 학교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학교가 다시 중학교와 다시 멀어진 탓에, 내가 사귄 새로운 친구들은 대부분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K 고등학교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직도 이런 학생다운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이 새삼 놀..
신예리 - 동물 시체에서 사는 아이(2) 알다시피 유진과 내가 계획한 끔찍한 범죄는 허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우리의 공생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공생이라기보다는 상호 간의 기생에 가까웠다. 우리는 깨진 거울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와중에 흉한 모습만을 왜곡해서 부각했다. 그 아이와 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혐오감마저 느꼈다. 우리는 아침마다 서로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우리가 세웠던 계획이 그들에게 들키지 않았는지 노심초사하며 정찰한 것이다. 그리고는 지난 밤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에 안도하며 같은 등굣길을 걸어 학교를 향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한 마디의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친구가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이런 불편한 기생 관계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우리 빌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