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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단편

유산

"은하씨는 자세가 안좋네."

 

갑자기 매니저가 말했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집에 가려던 은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선 채로 그를 돌아봤다. 가는 것도, 멈춘 것도 아닌 그녀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매니저는 혼자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듣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두 손을 배꼽 위로 포개 얹었다.

 

"봐요. 인사는 이렇게 하는 건데."

 

그리고 그 두 손을 그대로 올려 복부도 가슴도 아닌, 가슴뼈 사이에 위치한 이름 없는 그곳에 올렸다. 차라리 심장에 가까워 보였다.

 

"은하씨는 이렇게 하잖아."

 

그가 허리를 숙였다. 꼭 아픈 사람 같았다.

 

"봐요. 은하씨. 인사는 얼굴이에요."

 

매니저는 무언가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 하면 꼭 이렇게 말했다. 봐요. 봐요, 은하씨, 화장이 너무 진하지 않아요? 봐요, 은하씨. 굽이 너무 높지 않아요? 이런 식이었다. 무엇을 보라고 하는 걸까. 은하는 그의 말버릇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에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늉을 한 것이다. 은하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언제까지 이 일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속으로 점쳐보았다.

 

처음에는 3년을 생각했다. 그 정도 일하면 다른 정말 가치 있는 일을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그 시간은 곧 2년으로 줄었다가, 1년까지 줄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아득히 멀게 느껴져 아연 해지곤 했다. 결국 그 각오는 '여름휴가까지만'이 되었다, '추석까지만'이 되었다, '올해까지만'이 되더니 지지부진하게 2년이 흘렀다. 이제는 정말 목표했던 3년이 눈앞으로 다가오니 그만둘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봐요, 은하씨, 얼굴이 멀쩡하면 인사도 잘해야죠.

 

은하는 뒷문을 통해 호텔을 빠져나왔다. 호텔 벽면을 바라보니 금색으로 도금된 國際라는 글자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 아래로는 The International이라는 영문자가 주석처럼 새겨져 있었다. 은하는 그것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은하와는 다른 문화권을 공유하는 외국에서 온 손님들은 그것이 멋지다고 생각하는지, 은하는 종종 그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손님들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필요 없어 보이는 그 주석마저 나름 의미가 있었는지, 은하는 종종 손님들의 대화 사이에서 "international hotel"이라는 단어를 잡아내곤 했다. 그런 문화권의 손님들과는 '밟지 말아주세요. 잔디가 아파해요.'라는 표지판도 공유할 수 없었는지, 도금된 금색 문자 앞만 흙바닥이 휑하니 드러나 유독 흉물스러웠다. 은하는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저 도금된 문자가 누구의 노력으로 매일 저렇게 번쩍일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야간에 근무가 끝나는 그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은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너무 노력한 나머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은하는 배 언저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렇지만 아무리 해봐도 손은 배로부터 조금 떨어진 허공 위를 맴돌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헤집는 느낌이 들어 도무지 손을 내려놓지 못했다. 토할 것 같았다. 은하는 그 원인을 알았다. 잊으려고 해도 그러지 못했다. 봐요, 은하씨. 사람은 넘어지면 일어날 줄을 알아야 해. 언제까지 넘어져 있으면 그 사람은 도태돼요. 들은 적 없는 이야기가 낯익은 목소리로 귓전을 헤맸다.

 

불빛 하나 없는 밤이었다. 가로등이 없는 길인 것은 알았지만, 원래 이렇게 어두웠던가. 달빛 하나 내리지 않았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삭월인가? 아니면 구름이라도 낀 걸까? 은하는 잠깐 생각해 봤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은하의 안에서 시간은 유동적이었다. 언제는 10일이었다가, 언제는 1일이 되는 그런 식이었다.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렇지만 은하는 이 어두운 퇴근길만큼은 좋아했다. 사람 없는 길거리는 을씨년스럽기보다는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레드카펫처럼 느껴졌고, 거리를 떠도는 취객과 세상의 저변에 깔린 영혼들은 그녀와 철저히 무관했다. 그들은 그녀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간혹 맞닿는 살갗에서는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은하는 그 거리감을 좋아했다. 세상과 자신이 동떨어져 있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은하는 그날을 잊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완전히 망각의 영역으로 집어넣었다고 믿는 그 순간 아무런 전조 없이 되돌아와 그녀를 짓눌렀다. 그럴 때마다 유독 몸이 무거웠다. 유독 배가 무서울 정도로 당겨왔다. 은하는 무심코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장이 쏟아져 내릴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도무지 잡을 수 없던 배가 그럴 때면 잘도 잡혔고, 은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무감에 몸을 떨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란 뜰채 같았다. 온갖 소중한 것들은 흘려보내고, 오로지 거품 같은 찌꺼기만을 남겼다. 그런 식으로 멍하니 상념하고 있자면 머지않아 흐리멍덩한 삶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갑자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라기보다는 영유아의 그것에 가까운, 매숨마다 생명을 짜내는 듯한 절박한 그 소리에 은하는 놀라서 깨어났다. 은하는 그제야 자신이 전철에서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피곤했던 게 틀림없다. 은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넓은 지하철 칸에 자신 혼자 앉아 있었다. 자신을 깨운 울음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은하는 서둘러 창 밖을 내다보았다. 창 밖에는 모노톤으로 잠식된 논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 너머로는 산이라기보다는 삼각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검은 덩어리들이 흐릿하게 비춰 보였다. 너무 오래 자 버린 것이 아닐까, 은하는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전철은 멈출 생각을 하질 않았다.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기 엄마, 애기 엄마."

 

은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아무도 없었던 노약자석에는 언제부터 앉아 있었는지 한 노파가 앉아 은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척 봐도 그녀의 어머니보다도 나이 든 노파는 무엇보다 시간과 싸우고 있는 것 같이 힘들어 보였다.

 

"저 애기 엄마 아닌데요."

 

노파는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었다. 은하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나 떠올려 봤으니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다. 오히려 비교하자면, 자신이 늙으면 이런 모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는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으로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아이, 아이 놓고 갔어, 애기 엄마."

"그러니까, 저 애기 엄마 아니라니까요."

 

은하는 방금 전에 들었던 아기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환청이 아니었던 걸까. 그렇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기가 보이는 일은 없었다. 왠지 기분 나빠졌다. 노파는 연신 "애기 엄마, 애기 엄마" 하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빨리 전철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전철은 계속 끝을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달려갈 뿐이었다.

 

"그러니까, 저 아이 없다니까요!"

 

은하는 자신이 지른 소리에 놀랐고, 그 내용에 다시 놀랐다. 되돌릴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것 같았다. 노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은하는 그 표정이 낯익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노파가 중얼거렸다. 은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말 그럴 리가 없었다. 뒤로 물러나던 은하의 등이 지하철 자동문과 맞닿았다. 은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검은 차창에 비추는 것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노파를 닮아 있었다. 노파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엄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은하는 핸드백을 들어 노파의 머리를 내리쳤다. 둔탁한 감각이 손끝에 퍼졌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육편을 때리는 것 같았다. 은하는 쓰러진 노파를 계속해 내리쳤다.

 

"난, 난 너 같은 자식 없어!"

"엄마, 엄마!"

 

노파의 목소리는 어느새 초로의 여성의 것이 되었고, 그 목소리는 곧 중년 여성이 되었다. 엄마, 엄마. 그러다가 은하와 비슷한 목소리가 되기도 했고, 성숙한 학생의 것이 되었다. 엄마, 엄마. 그러더니 다시 풋풋한 청소년의 목소리가 되었다가, 어린 소녀의 것이 되었다. 엄마, 어마. 이빨이 빠지기라도 한 듯이 그 발음이 점점 흐려졌다. 아기의 울음소리. 그 소리마저 점점 줄어들어 둔탁한 고기 때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육편이라기보다는 갈린 고기를 때리는 것 같았다.

 

"왜 태어나지도 않았잖아... 나한테 왜 그래... 태어나지도 않았잖아...."

 

형체가 남지 않은 붉은 덩어리를 은하는 계속해 내리쳤다. 내장의 파편. 태반. 태아. 육편.

 

"은하씨."

 

"은하씨!"

 

은하는 눈을 떴다. 매니저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인사는 그렇게 하는 거지."

 

은하는 고개를 내렸다. 두 손이 배꼽 위에 곱게 포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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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 써본 단편.

너무 어수룩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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