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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단편

미완성 단편 (민)

민, 처음 너와 만난 순간을 기억해. 그것은 내 머릿 속에서 몇 번이나 회오리 치며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기억이기에, 민, 나는 너를 보다 특별히 여겼단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양복을 차려입고 빵모자를 푸욱 눌러 쓴 단정함일까, 아니면 네가 들어오는 순간 화악 하고 퍼져나간 소독약 냄새일까. 그것이 무엇이건 나는 너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의 살짝 내려간 한 쪽 입꼬리와 반쯤 닫힌 음울한 얼굴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단다. 너의 불행의 주박은 다른 사람마저 끌어들이는 것이란다, 민. 그렇다고 내가 너를 탓할 생각은 없단다. 민, 너는 네가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하고 더 많은 짐을 지려는 그런 아이였단다.

 

"부모님이 죽었어요."

 

당돌하게 너는 그런 얘기를 했단다, 민. 네 부모님 양 쪽 모두를 알고 있는 나에게는 꽤나 영문 모를 말이었던 것이지. 나는 그것이 네가 만들어낸 거짓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단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만들어낸 아우성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너에 대해 알기 시작했단다. 나는 너를 달래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저 내 본분을 따르기로 선택했단다. 너를 앉히고 종이컵에 따라진 커피를 내주며 너에게 필요한 절차를 알려주거나 하는 것 따위의 일 말이다. 그래서는 안됐었는데. 그런 말은 해서 안된다고 너를 다그치거나, 천천히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렇게 물었어야 했었는데.

 

민, 그 날 밤은 길었단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랬을 것이지. 너는 종이컵을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듯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잡은 채, 하염없는 침묵으로 시간을 흘려 보냈고, 나 역시 의미없는 웅성거림으로 너를 대했기에 우리 둘의 시간은 유독 길었을 거야. 그러나 민,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네가 무언가 말하기를 기다린 게야. 울거나 변명을 늘어놓거나, 끝도 없는 거짓말을 이어가기를, 나는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너는 그저 "감사합니다" 한 마디를 하고는 굳게 입을 다물었지.

 

그 짧은 밤이 지나고 해가 뜨자 너는 감사와 작별을 고하고 그렇게 사라졌지. 그곳이 제자리가 아니란 것을 아는 저녁 비마냥 그렇게. 그렇지만 민, 네 빈자리는 아주 느리게 차더구나. 젖은 땅과 뿌연 물안개가 희미하게 네가 그 곳에 있었음을 그렇게 호소하더구나. 새벽 내내 함께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아직도 네가 그 의자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침통한 눈으로 내 쪽을 막연히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 시선을 느꼈단다. 정말로 평범한 일은 아니었던 셈이지.

 

민, 너는 모르겠지만, 그날 나는 편지를 썼단다. 반쯤 잠에 취한 채로 허깨비마냥 의미 없는 길고 긴 문자를 나열해, 결국은 누구에게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몰라 그대로 접어 다시는 쳐다보지 않을 구석진 책장 위에 올려놓았지. 민, 그날 나는 악몽을 꿨단다. 그것은 분명 너의 탓이었어.

 

너는 그런 아이였지. 민, 네가 떠난 뒤에 나는 어디서나 너의 존재를 느꼈단다. 그저 희미하여 잘 보지 않으면 그것이 너라는 것도 모를 정도였지만 분명 그것은 너였어. 나의 일상 속을 떠도는 네 자취는 오후의 라디오 속에서도, 싱크대 위의 찻잔 속에서도 간혹 나타나 나를 놀랍도록 우울하게 만들곤 했단다. 민, 너는 그렇게 먼지 같이 하얀 아이였어. 그럼에도 너를 잊고자 하는 노력은 마치 죄악처럼 느껴져 나는 그것을 감내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단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기억하니?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날처럼, 굳게 닫힌 창문 틈 사이로 가을바람의 한기가 새어 나와 피부 사이사이로 파고들던 그날을. 한심한 일이지만, 나는 네가 다시 나를 찾아 왔을 때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단다. 분명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현실이 된 확신의 무게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라 하였던 거야. 그것은 너도 같아 보였단다, 민. 우리는 말 하지 않음으로써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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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최대한 예쁜 문장으로만 별 생각 없이 꾸며보고 싶어서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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