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시피 유진과 내가 계획한 끔찍한 범죄는 허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우리의 공생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공생이라기보다는 상호 간의 기생에 가까웠다. 우리는 깨진 거울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와중에 흉한 모습만을 왜곡해서 부각했다. 그 아이와 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혐오감마저 느꼈다.
우리는 아침마다 서로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우리가 세웠던 계획이 그들에게 들키지 않았는지 노심초사하며 정찰한 것이다. 그리고는 지난 밤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에 안도하며 같은 등굣길을 걸어 학교를 향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한 마디의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친구가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이런 불편한 기생 관계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우리 빌라는 K 초등학교와 K 중학교의 중간쯤에 있어, 이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보통 K 초를 졸업하고 K 중으로 진학하게 된다. 그래서 주변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들은 모두 K 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나는 아버지를 설득해 멀리 떨어진 K 여자 중학교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도 내가 공학을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뜻 허락해 줬다. 어머니는 탐탁지 않아 보였지만, 집안에서 어머니의 의견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K 여자 중학교는 K 중학교에 비하면 우리 빌라로부터는 꽤 떨어져 있었다. 동네에 있는 모든 교회를 찍고 돌아가는 마을버스를 타면 30분 정도, 걸어서는 1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작고 흔들리는, 그리고 사람이 많은 버스를 타는 것이 싫어서 걸어서 등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덕에 나는 남들보다 1시간은 일찍 집을 나오고, 1시간은 늦게 집에 돌아왔다. 내가 예상한대로 유진은 K 중학교에 진학했고, 그렇게 사실상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접점은 사라졌다. 덕분에 나는 3년간, 유진과 이웃집에 살면서도 그 아이로부터 해방된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정든 초등학교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아침 일찍 일어나 한참을 걸어야 하는 것도 그 대가라고 생각하면 별거 아니었다.
걱정한 중학교 생활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여자 중학교 특유의 단결력 덕분이었다. 아이들은 번갈아 타겟을 정해서 왕따 시켰고, 그 무리에 낄 수만 있으면 금방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 아버지를 닮은, 기가 쎄보이는 날카로운 눈초리 덕분인지, 아니면 단순히 공부를 잘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다른 지역에서 온 입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타겟으로 잡히는 일이 없었다.
특히나 오래 괴롭힘을 당한 아이가 있었는데, 자그마치 1학년 1학기 중반부터 3학년 졸업할 때까지 괴롭힘이 이어졌다. 성적은 중상위권은 했고, 커다란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가방을 메고 다니는 아이였다. 조금 눈에 띄는 점이라면 덧니 때문에 입이 약간 튀어나온 정도였는데 애교로 봐주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는 그것도 충분한 명분이 되었는지, 집요하게 그 아이의 외모를 빌미 삼아 괴롭혔다.
내가 보기에는 괴롭히는 애들 중에서도 그 아이보다 못생긴 아이도 제법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정말로 그 아이가 못생겨서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았다.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어른들이야 괴롭힘의 원인을, 무리에 찬동하며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는 것이나, 자신보다 유능한 사람에 대한 적개심 같은 다양한 이유로 설명하지만, 직접 관찰한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마 재밌으니까 그랬겠지. 오로지 괴롭힘당하는 아이만 바보같이 그 말을 믿고, 치아 교정을 하거나 화장을 하거나 했지만, 그것도 괴롭힘의 소재로 이어질 뿐이었다.
이렇듯, 나는 즐겁게 중학교 생활을 보냈다. 평범한 중학생 같은 충실한 나날이었다. 그런 나의 일상을 어떻게든 망치고 싶었는지, 유진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편지를 보냈다.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데 무려 우표까지 붙여서 우체국을 통해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아둔한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그 아이는 그 한도를 모르는 것 같았다. 당연히 나는 대부분 찢어서 버렸지만, 깜빡한 것이 있는지 얼마 전에 방을 정리하다가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해 여기 끼워 놓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것도 버리고 싶었지만, 그 아이가 남긴 유품이라 생각하고 남겨두기로 했다. 더욱이 나보다는 가십거리를 찾아다니는 기자들에게는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시금 읽어보니 기억보다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마치 그것을 사실로 여기는 듯이 망상을 늘어놓으니 모르는 사람은 속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내용을 읽기 전에, 혹은 이미 읽은 사람에게 당부하지만, 쓰여있는 내용과 달리 우리 사이에는 어떤 우정도 없었다. 실제로 나는 한 번도 답장을 보낸 적이 없었고, 편지를 보관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일방적인 묘사와 달리, 나는 그 아이를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그 아이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아이는 타고난 거짓말쟁이라, 적혀 있는 내용 중 대부분이 잘 짜맞춰 진 헛소리인 것이다. 나는 중학교 3년 내내 그 육교를 건너지도 않았다.
예리야, 잘 지내고 있니?
이렇게 말하려고 하니까 이상하네. 우리는 바로 옆집이니까 원한다면 언제든지 대화하고 얼굴 볼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너와 내가 만나지 못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1년 정도 되었을까? 너와 같은 중학교에 갔더라면 매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후회돼.
사실 나는 너한테 편지를 보내면 안 돼. 너희 어머니께서 내게 너와 만나지 말라고 당부했거든. 그렇지만 이건 편지니까 엄밀히 말하면 만나는 것에 들어가지는 않지? 그래도 안된다고 생각하면 그냥 이 편지를 읽지 말고 버려주렴. 그냥 버리면 너희 어머니가 주워서 볼 수도 있으니까 갈기갈기 찢거나 태워서 버리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해. 물론 너는 똑똑하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걱정돼서 말해봤어.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네. (물론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어줘도 돼! 대신 들키지 않으면 좋겠네!)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니? 부끄럽지만 나는 별로 친구를 만들지 못했어. 아는 애들이 대부분 다른 반이 됐거든. 나 빼고 다른 애들은 다 아는 사이였는지, 처음 반이 잡힌 날부터 서로 떠들고 있었어. 처음 몇 번은 걔네와 같이 밥을 먹거나 얘기하기도 했지만, 나는 역시 혼자 있는 게 더 편한 것 같아서 어울리는 걸 그만뒀어.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아줘. 걔네는 좋은 아이들이고, 나는 딱히 왕따를 당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역시 너하고 같은 중학교를 다니는 게 좋았을 것 같아. 그러면 반이 달라도 쉬는 시간에는 만날 수 있으니까.
K 여중 생활은 어떻니? 여중이니까 K 중하고는 분명 다르겠지? 중학교에 올라오니 남자아이들은 더 이상해졌어. 매일 야한 얘기를 하고, 엄청 시끄럽고, 이상한 냄새가 나. 체육 시간만 끝나면 반에서 땀 냄새가 엄청 나는데 정말로 나는 그런 지독한 냄새는 살면서 처음 맡아봤어. 남자애들은 반에서 뛰어다니는데, 그때마다 책상을 강하게 치고 가. 어릴 때는 그래도 내가 더 키가 커서 괜찮았지만, 요즘은 남자애들이 나보다 키가 더 커서 조금 무서워. 역시 나도 여중에 들어가는 게 좋았을 것 같아.
요즘에는 쉬는 시간에 책을 읽고 있어. 좋은 책이라 너에게도 꼭 추천해주고 싶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라는 책인데, 혹시 읽어본 적 있니? 거기에 보면 원래 살던 별에서 떨어져 나와 고향별에 있는 장미 친구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어린 왕자가 나오는데, 나는 그 모습이 왠지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우리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생이별한 건 아니지만 내가 항상 너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사실 나는 얼마 전에 너를 본 적이 있어. 우리 집 앞에 있는 육교 알지? 우연히 길을 가는데 육교를 건너가는 네가 보이더라. 반가워서 말을 걸까 하기도 했는데, 네 표정이 유독 어두워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어. 지금 생각하면 아마 말을 걸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어야 했던 것 같은데 미안해.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건 사실 그것 때문이기도 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거든.
괜찮으면 언제라도 답장 보내줘. 물론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돼. 그러면 너는 아무 일도 없었고, 내가 공연한 걱정을 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너의 소꿉친구, 정유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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