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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단편

미완성 단편 (풀무)

평생 철을 만져온 영식은 다른 일을 몰랐다. 언제는 철판을 밀기도 했고, 언제는 철봉을 깎기도 했지만 그 본질은 언제나 철이었다. 그저 우직함만이 미덕인 줄 알고 35년간 철을 밀고 닦았다. 어느새 고통보다 익숙한 것이 된 철판의 열기와 무게가 그의 세월을 증명해 주었다. 한 때 뜨겁게 타올랐던 정열은 그저 안으로 삭아 영식의 내면에서 끓었다. 자신은 아직 식지 않았다고 영식은 생각했다. 가슴 어딘가에 있는 풀무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고, 그리 생각할 때마다 영식은 타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자신을 두드리는 고행자였고, 그때마다 단단하고 순수한 것이 되었다. 철을 다루는 그의 모습에는 경건함마저 묻어났다. 영식은 용광로였다. 불순물을 녹여내 오롯이 순수한 것만이 표면에 떠올랐다. 그런 만큼 그의 얼굴은 단단해 졌는지 모른다. 영식에게 안면마비가 찾아온 것은 작년 겨울이었다.

 

영식은 표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참는 것만이 좋은 것이라 배워온 어른이라 그런지 언제나 눈살을 모으고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주둥이가 못난 저어새 같았다. 술이 들어가도 얼굴만 붉어지고 말았다. 술을 담는 부대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계속 붉게 붉게 물들 뿐이었다. 기뻐도 마셨고 슬퍼도 마셨다. 그런 우직함이 시시한 것이었는지 그는 언제나 혼자 마셨다. 그래도 영식은 괘념치 않았다. 뜨겁게 달군 쇠는 물로 식혀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자신의 풀무에 찬 술을 보냈다.

 

신세지고 있는 사장님으로부터 혼사가 들어온 것은 마흔을 넘길 무렵이었다. 전등이 어두운 공장 구석에 처박혀 모든 젊음과 열정을 불태운 그였기에 여자를 아는 일도 없었고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며 늙은 사장은 난생처음 보는 이름의 여성을 소개해 주었다. 응우옌, 처음 발음하는 그 울림은 이상할 정도로 낯익어 수차례나 입에서 다시 튕겨보게 되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에게 소개받은 만큼 믿을 수 있었고 달리 피할 이유가 없었기에 영식은 그날부터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밖에 없는 그 여인과 동거하게 되었다. 혼인 신고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와서는 그것이 진짜 이름인지 알 수도 없었다.

 

영식은 철을 때렸다. 때리는 만큼 손도 철도 단단해졌다. 세상은 그렇듯이 정직한 것이다. 고통 없는 성장은 없고 성숙한 만큼 다치는 법이다. 응우옌, 한국어라고는 남들의 반의반만큼도 하지 못하는 그 어린 30대 여성이 영식의 가슴 한 켠을 차지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하지도 못하는 한국말 중에 그것을 제일 잘한다는 듯이 항상 "영식, 영식." 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그녀는 그와 달리 참 웃기도 잘 웃었고 울기도 잘 울었다. 그녀가 울 때마다 영식도 아팠다. 그것은 불완전함이었고, 연약함이었으며, 온기가 있는 부드러운 살갗이었다. 살을 맞댈 때마다 영식은 속 안에 차오르는 죄악감에 술을 마셨다. 어느새 가득 쌓인 불순물을 가라앉히고 차갑고 단단한 것만을 남기고자 그렇게 잠든 여인을 내버려두고 혼자 술을 마셨다. 누군가 말했던가, 예수의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온 피에서는 진한 알코올 향이 흘렀노라고. 종이컵에 담긴 것은 성혈이었다. 두 모금 남짓한 차갑고 쓴 성혈이 풀무를 붉게 태웠다. 밤을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그렇게 불태운 것이다.

 

가장 순수한 것만 골라낸 철도 언젠가는 녹스는 법이다. 저 외국의 고명한 학자, 켈빈이라는 자가 그리 말했다 하지 않나, 불변이란 없는 법임을, 모든 열은 사그라지는 법이 없다는 것을. 영식은 언젠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등학교의 문턱조차 밟아본 적 없는 그였지만 이미 가장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찬 술이 쏟아질 때마다 도리어 속에서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솟고 있음을, 어떤 비극도 인간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고행자인 동시에 수사였다. 여성도 모르는 그는 언제나 사랑의 장인이었던 것이다.

 

영식은 응우옌과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미숙한 한국어 실력 때문도, 그에 못지않게 무뚝뚝한 영식의 성격 때문도 아니었다. 영식은 자신의 가장 연약한 살로 그녀를 품었다. 언어 이상의 고상한 표현 방식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밤이면 천장에 무수한 나비가 흩어졌다가 하나로 뭉쳤다 반복하며 춤을 추었고, 저 천장의, 저 하늘의, 저 우주가 보여주는 황홀경 속에 항상 홀로 술을 부었다.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나비들은 그 빛나는 풀무 속에 제 몸을 던져 불살랐다. 마치 죽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영식은 항상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기억을 잃었다. 그는 술에 지는 법이 없었고, 불길은 그저 거세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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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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